주영헌 시인의 ‘꽃의 마중’: 삶의 여유가 선물한 계절의 위로

아파트 화단에 핀 노란 산수유, 누구를 마중하는 걸까요?

아파트 화단에 핀 노란 산수유, 누구를 마중하는 걸까요?

주영헌 시인의 미발표 시, 「꽃의 마중」은 아파트 화단에 피어오른 노란 산수유 꽃을 보며 시작됩니다. “매해 잊지 않고 피어오르던 저 꽃, 누구를 마중하러 피어오르는 것일까요.” 이 질문은 비단 시인만의 것이 아닙니다. 바쁜 일상에 쫓겨 무심히 지나쳤던 길가의 작은 생명들이 어느 날 문득 말을 걸어올 때, 우리 역시 비슷한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과연 저 꽃들은 누구를 위해 저토록 환하게 피어나는 걸까요? 시인은 그 답을 ‘그이’라고 말하며, 이내 그 ‘그이’가 바로 ‘나’ 자신이었음을 깨닫습니다. 지독히 혼자라고 느꼈던 순간들, 사실 우리는 단 한 번도 혼자가 아니었을지 모릅니다.

사계절 내내 이어지는 자연의 환대

사계절 내내 이어지는 자연의 환대

우리를 마중 나오는 것은 비단 봄의 산수유뿐만이 아닙니다. 시인의 시선을 따라가 보면, 세상은 온통 우리를 향한 환대로 가득 차 있습니다. 길을 걷다 보면 개나리꽃이, 민들레꽃이 손을 흔듭니다. 계절마다 우리를 기다리는 오랜 벗들이 있습니다.

  • 봄: 매화, 산수유, 개나리, 벚꽃, 목련이 앞다투어 꽃망울을 터뜨리며 봄의 시작을 알립니다.
  • 초여름: 철쭉, 유채꽃, 모란, 장미가 화려한 색채로 여름의 문을 엽니다.
  • 한여름: 장마와 무더위 속에서도 수국, 연꽃, 해바라기, 무궁화, 백일홍은 꿋꿋이 꽃대를 밀어 올리며 생명의 강인함을 보여줍니다.
  • 가을: 코스모스, 구절초, 국화, 억새가 서늘한 바람에 온몸을 흔들며 산책길의 다정한 벗이 되어줍니다.
  • 겨울: 모든 것이 얼어붙은 듯한 매서운 추위 속에서도 동백과 납매는 눈 속에서 빨갛고 노란 손을 들며 아직 우리가 여기에 있다고 속삭입니다.

이처럼 자연은 쉼 없이, 계절의 변화에 따라 모습을 바꾸며 우리 곁을 지킵니다. 외로움이 깊어 상처가 되었던 날들, 사실은 눈을 조금만 돌리면 환한 얼굴로 우리를 맞아주는 오랜 벗들이 있었다는 시인의 깨달음은 우리에게 큰 위로를 줍니다.

꽃이 눈에 들어오기까지, 마음의 여유를 찾기까지

꽃이 눈에 들어오기까지, 마음의 여유를 찾기까지

흥미로운 점은 시인 역시 40대 중반까지는 꽃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는 고백입니다. 꽃 축제 소식에도 ‘그런가 보다’ 하고 넘겼던 시절. 그에게는 꽃보다 더 눈길을 끄는 것, 마음을 온통 차지하는 것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아이들을 키우고 직장생활을 하느라 분주했던 마음입니다.

“아무리 꽃이 이뻐도 내 마음이 근심으로 가득하면 꽃이 이뻐 보일 수 없습니다.”

이 문장은 많은 이들의 공감을 자아냅니다. 젊은 시절, 우리는 저마다의 무게를 짊어지고 치열하게 살아갑니다. 시인은 자신의 경험을 통해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를 생생하게 전합니다. 아이를 키우며 직장생활을 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고역이었습니다. 아픈 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기고 출근해야 했던 가슴 아픈 발걸음, 출산 휴가는 고작 2개월에 임산부에 대한 배려조차 없었던 시절. 육아휴직이라도 쓸라치면 일과 진급에서 배제되는 것이 당연시되던 때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길가의 꽃이 눈에 들어오기란 어림없는 일이었습니다. 생존과 책임의 무게에 짓눌린 마음에는 아름다움을 담을 공간이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꽃을 보게 되는 것은 단순히 나이가 들어서가 아니라, 삶의 분주함이 잦아들고 마음에 ‘여유’라는 작은 틈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에게 손이 덜 가게 되고, 비로소 내 발 앞까지 도착한 여유를 붙잡았을 때, 시야는 비로소 가까운 곳에서 조금 더 먼 곳의 풍경으로 확장됩니다.

넓어졌다 다시 좁아지는 삶의 시야

넓어졌다 다시 좁아지는 삶의 시야

아이들을 다 키워놓고 나니 비로소 꽃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가까운 곳에 묶여 있던 시야가 너른 곳으로 향하며,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세상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내와 함께 여행을 다니고, 주말에 교회를 나가는 소소한 일상의 변화 속에서 계절의 변화와 꽃의 인사를 알아차리게 된 것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시인은 우리의 시야가 너른 곳에 머무는 시간 또한 그리 길지 않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나이가 더 들면서 시야는 다시 좁아지고, 결국에는 자기 자신만을 바라보는 ‘어른아이’로 돌아가는 시간이 올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 또한 거스를 수 없는 자연스러운 현상일지 모릅니다.

그렇기에 더욱 중요한 것은 ‘지금’입니다. 우리의 시야가 활짝 열려 세상을, 자연을, 아름다운 봄 풍경을 담을 수 있는 바로 이 순간 말입니다.

올봄, 아쉽지 않도록 마음껏 즐기세요

올봄, 아쉽지 않도록 마음껏 즐기세요

주영헌 시인의 글은 ‘꽃의 마중’이라는 아름다운 시적 표현을 통해 우리 삶의 단계를 돌아보게 합니다. 치열했던 젊은 날의 우리를 위로하고, 여유를 찾은 지금의 우리를 격려하며, 다가올 날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도록 이끌어줍니다.

자연이 우리에게 값없이 준 선물, 이 아름다운 봄을 마다할 필요는 없습니다. 가까운 공원이든, 아파트 화단이든, 혹은 출근길 길가에서든, 우리를 마중 나온 작은 꽃들에게 눈길을 건네보는 것은 어떨까요? 그들의 환한 얼굴 속에서 ‘그이가 바로 나였다’는 시인의 깨달음처럼, 나를 향한 세상의 따뜻한 위로를 발견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올봄이 다 지나가도 아쉽지 않도록, 우리에게 주어진 이 선물을 마음껏 누려야겠습니다.


주영헌 시인은 충북 보은 출생으로, 2009년 등단하여 『아이의 손톱을 깎아 줄 때가 되었다』, 『당신이 아니면 나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 등의 시집을 펴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