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적온 시인의 ‘원더풀 마이 라이프’: 지루한 세상에 던지는 명랑한 파괴

희망가 너머의 잔혹한 현실, '원더풀 마이 라이프'

희망가 너머의 잔혹한 현실, ‘원더풀 마이 라이프’

많은 이들이 고단한 삶의 위로로 봄여름가을겨울의 「Bravo, My Life」를 떠올립니다. ‘해 저문 어느 오후, 집으로 향한 걸음 뒤엔 서툴게 살아왔던’ 지난날을 돌아보며, 그럼에도 ‘일어나 앞으로 나가, 네가 가는 곳이 길이다’라며 스스로를 다독이는 희망의 노래. 서툴고 부족해도 한 걸음씩 나아가다 보면 언젠가 원하는 곳에 닿을 것이라는 격려는, 불확실한 내일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따뜻한 위안을 줍니다.

하지만 만약 그 길이 처음부터 막혀있다면, 나아갈수록 더 깊은 절망만이 기다리고 있다면 어떨까요? 이적온 시인의 시 「원더풀 마이 라이프」는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에게 불편하고도 날카로운 질문을 던집니다. 희망만으로 포장하기에는 너무나 가혹한 현실의 민낯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며, 우리가 애써 외면해 온 ‘지루한 것들’의 종말을 선언합니다.

지루함의 종말과 역설적인 명랑

지루함의 종말과 역설적인 명랑

시는 ‘지루한 것들의 종말이었다’라는 강렬한 문장으로 시작합니다. 여기서 ‘지루함’은 단순히 따분함이나 권태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시인이 묘사하는 풍경을 따라가 보면 그 의미가 명확해집니다.

어느 해 질 녘에 유성우처럼 쏟아지는 머리를
뒤통수 없이 저무는 얼굴을
아스팔트 위로 처박혀 뒹구는 이마들
그걸 훔치는 사람들
살아남기 위해 광대 짓하는 사람들

이것은 폭력과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 일상화된, 처참하고 기괴한 세계의 모습입니다. 이 끔찍한 광경이 매일같이 반복되어 더 이상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하는 상태, 즉 부조리와 폭력의 일상화가 바로 시인이 말하는 ‘지루함’의 정체입니다. 고통이 만연하지만 누구도 그것을 제대로 직시하거나 해결하려 하지 않는, 견고한 위선으로 가득 찬 세계인 셈입니다.

이러한 지루함을 깨기 위해 화자가 내놓는 해법은 놀랍게도 ‘명랑’입니다. 하지만 이 명랑함은 우리가 아는 긍정적이고 유쾌한 감정이 아닙니다. ‘비스트로의 유리창을 깨부술 만큼만 명랑해지자’는 다짐에서 알 수 있듯, 그것은 파괴적이고 공격적인 에너지를 동반합니다. 차가운 분노와 절망을 역설적으로 표현한, 세상을 향한 가장 날카로운 조롱이자 반어법인 것입니다.

비스트로: 분리된 세계의 상징

시의 중심에는 ‘비스트로(bistro)’라는 공간이 있습니다. 비스트로는 본래 작고 아늑한 프랑스식 식당으로, 편안함과 여유를 상징하는 공간입니다. 하지만 시 속 비스트로는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닙니다.

  • 창밖의 세계: 아스팔트 위를 뒹구는 이마들, 생존을 위해 광대 짓을 하는 사람들로 가득한 지옥도.
  • 창 안의 세계: 그런 참혹한 풍경을 마치 하나의 볼거리처럼 관람하며 우아하게 식사를 즐기는 사람들이 있는 평화로운 공간.

이처럼 비스트로의 유리창은 안전한 내부와 위험한 외부, 무관심한 관찰자와 고통받는 당사자를 가르는 경계선 역할을 합니다. 창 안의 사람들에게 창밖의 고통은 그저 식욕을 돋우는 이색적인 풍경일 뿐입니다. 이 기이한 식욕과 혐오가 교차하는 공간은, 타인의 고통을 소비하며 자신의 안위를 유지하는 현대 사회의 축소판과도 같습니다.

화자가 깨부수고 싶어 하는 것은 단순히 유리창만이 아닙니다. 그것은 두 세계를 분리하고, 불의를 외면하게 만드는 사회의 견고한 시스템과 위선 그 자체입니다. ‘차가운 완두콩 스튜 말고 딸딸 끓는 샐러드를 내와!’라는 외침은 이 거짓된 평화와 안락함에 대한 격렬한 거부 반응입니다.

'원더풀 마이 라이프'라는 잔인한 농담

‘원더풀 마이 라이프’라는 잔인한 농담

시의 제목인 ‘원더풀 마이 라이프’는 이 모든 상황 속에서 가장 지독한 역설로 다가옵니다. 무엇이 이 삶을 ‘원더풀’하게 만드는 걸까요?

화자는 점령전이 싫으면 술래잡기를 제안하며, ‘전력으로 쫓아봐 한 끗 차이로 도망갈게 / 실수로 진심이어봐 모른 척 겁에 질릴게’라고 말합니다. 이는 무의미한 생존 게임에 대한 냉소적인 태도를 보여줍니다. 그러다 끝내 이 모든 것이 지루해진 화자는 자신의 ‘머리를 던져 유리창을 깨’는 극단적인 선택을 합니다.

끝내 지루해진 내가 머리를 던져 유리창을 깨면
훔쳐 가 음미해 노래해
어때요 나 덕분에 명랑합니까?
나는 덕분에 명랑합니다

이 마지막 장면은 충격적입니다. 화자는 자신의 파괴 행위를 통해 비로소 ‘명랑’해진다고 고백합니다. 이는 수동적으로 고통을 감내하던 상태에서 벗어나, 세상을 향해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키는 능동적인 행위자가 되었을 때 얻는 해방감을 의미합니다. 나의 파괴와 고통이 당신들의 ‘명랑함(볼거리)’이 된다면, 나 또한 그 행위 자체로 ‘명랑’해지겠다는 선언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 시가 말하는 잔인하고도 슬픈 ‘원더풀 마이 라이프’의 진정한 의미일 것입니다.

결국 이적온 시인의 「원더풀 마이 라이프」는 우리에게 안락한 위로 대신 불편한 질문을 던집니다. 당신이 앉아 있는 비스트로의 창밖 풍경은 안녕하신지, 그리고 그 견고한 유리창을 깨부술 만큼의 ‘명랑함’을 품어본 적이 있는지 말입니다. 시인의 질문은 여전히 우리 삶의 자리에서 유효한 메아리로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