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영우 시인의 ‘양재’를 읽고 떠오른 20대의 ‘착한 오빠’ 콤플렉스

부영우 시인의 '양재'와 마주하다

부영우 시인의 ‘양재’와 마주하다

최근 제 마음을 깊숙이 파고든 시 한 편이 있습니다. 부영우 시인의 시집 『양재』에 수록된 동명의 시, 「양재」입니다. 시를 읽는 내내 마치 제 젊은 시절의 독백을 엿듣는 듯한 기시감에 사로잡혔습니다. 특히 한 구절이 제 뇌리에 박혔습니다.

나는 누나를 생각하면 양재에 가는데
누나는 나를 생각하면 철학이 떠오른다니

이 구절을 읽는 순간, 잊고 있던 20대의 제가 떠올라 가슴이 아릿했습니다. 저 역시 한때 “나는 결혼도 못 할 거야”라고 되뇌던 암울한 청춘을 보냈기 때문입니다. 결과적으로 저는 누구보다 빨리 결혼해 25년째 행복한 결혼 생활을 이어오고 있고, 세 딸의 아버지가 되었지만, 그 시절의 저를 돌아보면 시 속의 화자와 꼭 닮아 있었습니다.

'좋은 오빠'라는 이름의 굴레

‘좋은 오빠’라는 이름의 굴레

20대 시절의 사진을 보면 지금보다 훨씬 훤칠합니다. 180cm가 넘는 키에 70kg을 겨우 넘는 깡마른 체형이었죠. 스스로는 매력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이상하게도 여자 후배들은 저를 잘 따랐습니다. 살갑게 “오빠, 오빠” 하면서 말이죠. 하지만 저는 세상에서 ‘오빠’라는 말이 가장 듣기 싫었습니다. 여기에는 아픈 사연이 있습니다.

군 전역 후 대전에서 대학을 다닐 때였습니다. 친하게 지내던 조교 형이 여자 후배 한 명을 소개해 주었습니다. 제 인생의 첫 번째 소개팅이었고, ‘드디어 나에게도 여자친구가 생기는구나’ 하는 설렘에 며칠 밤을 뒤척였습니다. 하지만 그 환상은 며칠 만에 산산조각 났습니다. 후배가 제게 말하더군요.

“오빠, 저는 아직 어리고 여러 사람을 더 만나보고 싶어요. 그냥 편한 오빠 동생으로 지내면 안 될까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이미 여동생이 둘이나 있었고, 과 대표를 맡고 있어 저를 ‘오빠’라고 부르는 후배들도 차고 넘쳤습니다. 더 이상 여동생은 필요 없었습니다. 저는 드라마 주인공처럼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나는 여동생 필요 없어!” 그 한마디를 끝으로 우리의 짧은 인연은 시작도 해보지 못하고 끝났습니다.

매력 없는 ‘착한 사람’의 비애

그 이후로도 연애는 순탄치 않았습니다. 한 달 남짓 사귀었던 학과 후배와는 가치관 차이로 헤어졌습니다. 돌이켜보면 저는 늘 ‘착한 사람’ 혹은 ‘좋은 오빠’의 범주에 속해 있었습니다. 이 말의 의미를 날카롭게 파고들면, ‘남자로서의 매력은 부족하지만, 인성은 괜찮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이성에게 매력을 어필해야 하는 연애 시장에서 이런 유형은 절대적으로 불리합니다. 시 속의 화자가 ‘비도 아니고 산울림도 아니고 왜 나의 동의어가 철학이냐’고 분통을 터뜨리는 것처럼, 저 역시 ‘왜 나는 늘 연애 상대가 아닌 좋은 오빠일 뿐인가’를 고민하며 괴로워했습니다.

시의 화자는 누나를 생각하며 양재천을 걷습니다. 누나와의 추억을 곱씹지만, 정작 누나는 자신을 ‘철학’이라는 영양가 없는 대상으로 여긴다는 사실에 서글퍼합니다. 이는 이성에게 매력적인 존재로 인식되지 못하는 사람의 깊은 고독과 상실감을 보여줍니다. 저 또한 그랬습니다. 이성에게 다가갈 용기도, 방법을 몰라 그저 주변을 맴돌다 상처받고 발가락을 오므리는 습관처럼 혼자 삭이고 마는, 그런 청춘이었습니다.

시간이 증명하는 '착한 사람'의 가치

시간이 증명하는 ‘착한 사람’의 가치

하지만 시간은 흘렀고, 저는 용인으로 올라와 대학을 다니다 교회에서 지금의 아내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스물여덟 살, 대학교 4학년 겨울방학에 결혼했습니다. 제 주변의 모든 사람이 너무 이르다고 말렸지만, 저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연애할 때 단점이었던 ‘착한 사람’이라는 특성은 결혼 생활에서 가장 큰 장점이 되었습니다. 남성 호르몬이 넘치는 매력적인 남자는 아닐지 몰라도, 아내와 아이들을 묵묵히 보살피고 가정에 헌신하는 남편이자 아버지가 되기에는 더할 나위 없는 조건이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저는 결혼할 남자로는 제가 최고였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습니다. 요즘 몸이 조금씩 아프기 시작하면서 아내의 존재가 얼마나 든든하고 고마운지 매일 느낍니다. 정말 아내밖에는 없습니다.

시 속의 화자에게도, 그리고 과거의 저와 같은 고민을 하는 청춘들에게도 말해주고 싶습니다. 영화나 드라마와 달리, 현실에서 ‘좋은 오빠’의 이미지를 극복하고 연인으로 발전하기는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주인공 버프는 현실에 없으니까요. 내 감정을 빨리 정리하고 현실에 맞춰 살아가는 것이 가장 현명한 방법일 수 있습니다.

양재천에서 발견한 행복의 모습

양재천에서 발견한 행복의 모습

물론 실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간절히 찾는다면, 저처럼 자신만의 짝을 만날 수 있을 겁니다. 혹은 혼자 사는 삶을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저는 제 딸들에게 항상 말합니다. 둘이 살든, 혼자 살든 스스로 만족하며 행복하게 살 수 있다면 그것이 정답이라고요.

시의 마지막 부분에서 화자는 양재천 다리 위에서 여러 사람의 모습을 관찰합니다. 책 보는 척 딴생각하는 칸트 동상, 잉어, 쌍둥이 유모차를 끄는 부부, 버드나무 끝을 함께 가리키는 노부부. 그는 그 평범한 일상의 풍경들을 보며 ‘어쩐지 누나의 일상도 행복할 것 같더라고요’라고 담담하게 말합니다. 이는 미움과 서글픔을 넘어선 성숙의 단계일 것입니다. 자신의 감정에서 벗어나 타인의 행복을 빌어줄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찾은 것이죠.

부영우 시인의 ‘양재’는 저에게 20대의 아픈 기억을 소환했지만, 동시에 현재의 행복을 다시금 깨닫게 해준 고마운 작품입니다. 양재천의 풍경처럼, 우리의 삶도 수많은 만남과 헤어짐, 슬픔과 기쁨이 어우러져 잔잔하게 흘러가는 것 아닐까요. 그 흐름 속에서 자신만의 행복을 찾으시길 진심으로 응원합니다.

시 쓰는 주영헌 드림.


※ 시인 이력 (출판사 제공)
– 부영우 시인: 2024년 웹진 《님Nim》에 시, 200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대중문화평론이 당선되었다. 시집 『양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