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도가 아닌 밀도로 승부하는 작가, 김연수와 히라노 게이치로의 만남 <근접한 세계>

마음의 허기를 채워주는 글쓰기, 속도가 아닌 밀도로 승부하는 작가

마음의 허기를 채워주는 글쓰기, 속도가 아닌 밀도로 승부하는 작가

세상에는 다양한 종류의 글이 있습니다. 읽는 순간 도파민이 터져 나오며 밤을 새우게 만드는 글이 있는가 하면, 독자와 끊임없이 밀고 당기기를 하며 다음 장을 궁금하게 만드는 글도 있죠. 하지만 오늘 이야기하고 싶은 작가의 글은 조금 다릅니다. 그의 글을 읽으면 늘 마음이 안심되고 평온해집니다. 음식으로 비유하자면, 자극적인 맛은 없지만 속을 든든하게 채워주는, 영양가 가득한 따뜻한 고기 국밥 같습니다.

요즘 유행하는 스타일과는 거리가 멀지도 모릅니다. 혈압을 높이고 심장을 뛰게 하는 강렬함 대신, 차분하게 삶의 본질을 파고드는 힘이 있습니다. 바로 서사의 속도가 아니라 문장의 밀도로 승부하는 작가, 제가 가장 사랑하는 소설가 중 한 명인 김연수 작가입니다. 그의 글은 언제나 피로에 지친 마음의 허기를 채워주고, 독자를 더 나은 삶의 방향으로 부드럽게 인도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런 그가, 상상치도 못했던 작가와 만났습니다.

상상 초월의 조합: 김연수 X 히라노 게이치로

상상 초월의 조합: 김연수 X 히라노 게이치로

“이 조합은 정말 말이 안 된다.”

이 책, <근접한 세계>의 출간 소식을 들었을 때 저도 모르게 터져 나온 말이었습니다. 늘 그의 신간을 기다리는 애독자로서 당연히 기대가 컸지만, 이번에는 그 기대의 결이 달랐습니다. 바로 일본의 소설가 ‘히라노 게이치로’와의 컬래버레이션이었기 때문입니다. 제게는 한국 최애 남성 소설가와 일본에서 두 번째로 좋아하는 소설가(첫 번째는 물론 하루키입니다)의 만남이었습니다. 이 엄청난 기획을 성사시킨 교보문고에 진심으로 감사의 박수를 보냅니다.

<근접한 세계>는 교보문고에서 기획한 ‘크로스 시리즈’의 첫 번째 책으로, 김연수 작가의 중편 소설 「아이의 정체성」과 히라노 게이치로의 중편 소설 「사형」, 그리고 두 작가의 깊이 있는 크로스 인터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처음에는 당연히 두 편의 소설만 담겨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저는 늘 그렇듯, 책의 상세 정보를 꼼꼼히 살피기보다는 작가의 이름만 보고 책을 집어 드는 편이니까요. 그래서 책을 받아본 뒤 인터뷰가 포함된 것을 보고는 그야말로 쾌재를 불렀습니다.

소설만큼이나 빛나는 크로스 인터뷰

그리고 그 인터뷰는 제 기대를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습니다. 단순히 작품에 대한 해설을 넘어, 두 거장의 소설관과 인생관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기 때문입니다.

  • 소설가는 왜 소설을 쓰는가?
  • 소설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은가?
  • 독자에게 무엇을 바라는가?

평소 제가 두 작가에게 궁금했던 모든 것들이 그들의 입을 통해 명료하고 품격 있게 펼쳐졌습니다. 감히 말하건대, 이 인터뷰 하나만으로도 이 책은 충분한 소장 가치를 지닙니다. 두 작가의 인생과 철학이 교차하는 지점을 엿보는 경험은, 두 편의 소설이 주는 감동과는 또 다른 차원의 깊은 울림을 선사합니다.

진실과 거짓 사이, 윤리적 딜레마를 묻다

진실과 거짓 사이, 윤리적 딜레마를 묻다

그렇다면 이 책에 실린 두 편의 소설은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을까요? 김연수와 히라노 게이치로, 이 두 명의 속도가 아닌 밀도로 승부하는 작가는 ‘윤리적 딜레마’라는 공통된 주제에서 각자의 이야기를 풀어냅니다.

우리는 흔히 세상을 선과 악, 옳고 그름이라는 이분법적인 잣대로 판단하려 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죠. 김연수 작가가 말했듯, “진실과 거짓은 단번에 구분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우리는 삶의 여러 순간에서 마주하게 됩니다. 두 소설은 바로 그 명확한 답이 없는 경계의 순간, 어떤 윤리적 선택의 기로에 선 인물들을 포착합니다. 독자는 진실과 거짓, 윤리적 문제와 책임감 사이에서 유영하는 인물들의 고뇌를 따라가며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히라노 게이치로의 소설 「사형」은 사형 집행을 명령해야 하는 법무대신의 내적 갈등을, 김연수 작가의 「아이의 정체성」은 입양한 아이를 통해 자신의 과거와 마주하게 된 한 남자의 이야기를 다룹니다. 전혀 다른 배경과 상황이지만, 두 소설은 모두 ‘나라면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라는 묵직한 질문을 우리에게 던집니다.

문학의 역할: 답이 아닌 질문을 던지는 것

문학의 역할: 답이 아닌 질문을 던지는 것

인터뷰에서 히라노 게이치로가 남긴 말이 특히 인상 깊었습니다.

“문학의 의미는 문제를 문제로서 제시하는 것에 있으며, 반드시 그 답을 작가가 준비할 필요는 없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종종 책 속에서 삶의 명쾌한 정답이나 위로를 찾으려 합니다. 하지만 정말 좋은 소설은 쉬운 답을 주기보다, 우리가 외면하고 있던 삶의 중요한 질문들을 수면 위로 끌어올립니다. 그리고 집요하게 묻습니다. “당신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당신이라면 이 운명을 기꺼이 껴안을 수 있겠는가?”라고 말이죠.

<근접한 세계>는 바로 그런 책입니다. 짧지만 인생을 관통하는 철학적인 질문을 남기는 책, 단숨에 읽히지만 그 여운은 오랫동안 마음속에 머무는 책입니다. 속도감 있는 전개나 자극적인 사건은 없지만, 문장 하나하나를 곱씹으며 인간과 삶의 본질에 대해 깊이 사유하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만약 당신이 속도가 아닌 밀도로 승부하는 작가들이 빚어낸, 잔잔하지만 깊은 울림이 있는 소설을 찾고 있다면, <근접한 세계>는 최고의 선택이 될 것입니다. 이 책을 통해 두 거장이 던지는 삶의 질문에 기꺼이 응답해보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