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 선배, 그리고 삼촌: 호칭으로 본 한국 사회
한국 사회에서 ‘호칭’은 단순한 부름말 이상의 의미를 가집니다. 상대방과의 관계, 나이, 사회적 위치를 모두 담고 있는 중요한 소통의 도구입니다. 특히 남성들 사이에서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을 부를 때 쓰는 ‘형’과 ‘선배’는 가장 보편적인 호칭일 것입니다. ‘형’은 친근하고 사적인 관계에서 주로 사용되며, ‘형님’이라는 조금 더 공손한 표현도 있습니다. 반면 ‘선배’는 학교나 직장 등 다소 공적인 관계에서 격식을 갖춰 부르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치열한 승부의 세계, 프로야구 선수들은 서로를 어떻게 부를까요? 얼마 전 한 언론 인터뷰에서 KBO리그 SSG 랜더스의 대만 출신 투수 왕옌청은 나이 차이에 따른 호칭 기준을 밝혀 흥미를 끌었습니다. 그는 “8살까지는 형, 그 이상은 선배라고 부른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는 현대 프로야구팀의 일반적인 문화를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규율이 중요한 스포츠 세계에서 10년 가까이 차이 나는 선배를 ‘형’이라고 부르기는 어렵고, 자연스럽게 ‘선배님’이라는 존칭을 사용하게 됩니다.
하지만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KBO리그 역사상 가장 강력한 ‘왕조’를 구축했던 팀에서는 전혀 다른 호칭 문화가 존재했습니다. 바로 전설의 명가, 해태 타이거즈입니다.
전설의 왕조, 해태 타이거즈의 규율과 문화
해태 타이거즈는 프로야구 원년인 1982년에 창단하여 2001년 시즌 도중 KIA 타이거즈로 승계되기까지, 20년이라는 길지 않은 역사 속에서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금자탑을 쌓아 올린 팀입니다. 해태는 한국시리즈에 총 9번 진출하여 9번 모두 우승하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웠습니다. 1989년에는 빙그레 이글스를 꺾고 4연패를 달성하는 등 그야말로 리그를 지배했습니다. 이러한 막강한 전력의 배경에는 세간에 널리 알려진 해태만의 엄격한 규율과 독특한 문화가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세간에서는 해태의 엄격한 상하 관계와 규율이 ‘해태 왕국’을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평가합니다. 선동열, 이종범, 이순철, 김성한 등 수많은 레전드를 배출한 해태의 팀 컬러는 ‘카리스마’와 ‘근성’으로 요약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토록 엄격했던 팀 분위기 속에서, 선수들 사이의 호칭에는 아주 흥미로운 기준이 있었다고 합니다. 바로 ‘선배’가 아닌 ‘삼촌’이라는 호칭의 등장이었습니다.
6년까지는 형, 7년부터는 ‘삼촌’?
믿기 어렵겠지만, 해태 타이거즈에는 “선배와의 나이 차이가 6년까지는 형, 7년 이상은 삼촌”이라는 불문율이 존재했습니다. 오늘날의 시각으로 보면 프로 스포츠팀에서 선배를 ‘삼촌’이라고 부르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보통은 나이 차이가 많이 나면 날수록 더욱 깍듯하게 ‘선배님’이라고 부르기 때문입니다.
이 독특한 ‘삼촌’ 호칭 문화가 실제로 어떻게 적용되었는지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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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까치’ 김정수와 ‘쌀봉이’ 강태원
1986년 한국시리즈에서 혼자 3승을 거두며 MVP에 오른 해태의 레전드 투수 ‘가을까치’ 김정수는 연세대를 졸업하고 1986년에 해태 유니폼을 입었습니다. 그의 고교 졸업 연도는 1982년입니다. 한편, 밥을 많이 먹는다고 해서 ‘쌀봉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후배 강태원은 순천상고를 졸업하고 1989년에 해태에 입단했습니다. 그의 고교 졸업 연도는 1989년입니다.
두 사람의 고교 졸업 연도 기준 차이는 정확히 7년. 해태의 불문율에 따르면 강태원은 김정수를 ‘삼촌’이라고 불러야 했습니다. 실제로도 그랬습니다. 넉살 좋기로 유명했던 강태원은 대선배인 김정수를 꼬박꼬박 “정수 삼촌”이라고 불렀고, 카리스마 넘치던 김정수 역시 이를 싫어하지 않고 “오냐”하며 후배를 자연스럽게 대했다고 합니다.
‘삼촌’ 호칭에 담긴 의미
엄격한 규율로 유명했던 해태 타이거즈에서 왜 ‘선배님’이 아닌 ‘삼촌’이라는 호칭이 통용되었을까요? 이는 어쩌면 해태만의 독특한 공동체 의식을 보여주는 단면일지도 모릅니다. ‘선배’라는 호칭이 주는 공적이고 다소 거리감 있는 느낌 대신, ‘삼촌’이라는 호칭은 비록 위계질서는 분명하지만 그 안에서 끈끈한 가족 같은 유대감을 형성하려는 시도였을 수 있습니다.
프로야구 원년 홈런왕이었던 김봉연, 원조 도루왕 김일권, 해태 유일의 신인왕 이순철 등 쟁쟁한 스타들이 함께했던 해태 왕조. 그들은 그라운드 안에서는 치열하게 경쟁하고 훈련했지만, 그라운드 밖에서는 ‘형’, ‘동생’, 그리고 ‘삼촌’과 ‘조카’ 같은 관계로 뭉쳤을 것입니다. 이러한 독특한 문화가 바로 9전 9승의 한국시리즈 우승 신화를 만든 원동력 중 하나가 아니었을까요?
어느덧 세월이 흘러 1962년생인 김정수는 60대 중반을 바라보고, 1971년생인 강태원도 50대 중후반의 나이가 되었습니다. 현역 시절 ‘삼촌’과 ‘조카’로 지냈던 그들은 지금 서로를 어떻게 부를지 문득 궁금해집니다. 해태 타이거즈의 ‘삼촌’ 호칭 문화는 한국 프로야구 역사에 남은 흥미롭고 정겨운 이야기로 영원히 기억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