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같은 출발선, 다른 현재
프로야구의 세계는 냉정하다. 한때 그라운드를 호령했던 스타도 세월의 흐름 앞에서는 자유로울 수 없다. 2007년 고등학교를 함께 졸업하고 프로의 문을 두드렸던 두 동갑내기, KIA 타이거즈의 고종욱과 FA 미아 신세가 된 손아섭의 현재는 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한 명은 연봉이 삭감되었지만 팀 내에서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고, 다른 한 명은 KBO리그 통산 최다 안타 기록을 보유한 살아있는 전설임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팀을 찾지 못해 추운 겨울을 보내고 있다. 이들의 엇갈린 행보를 통해 프로 선수의 가치와 현실을 깊이 있게 들여다본다.
고종욱: 삭감 속에서 찾은 가치와 안정
KIA 타이거즈의 베테랑 외야수 고종욱은 2024시즌을 앞두고 연봉 삭감을 받아들였다. 지난해 1억 5천만 원에서 33%가량 삭감된 1억 원에 도장을 찍었다. 30대 후반의 나이, 그리고 전문 대타라는 그의 팀 내 입지를 고려하면 아쉬울 수 있는 결정이지만, 그는 군말 없이 팀의 제안을 수락했다. 이는 프로 세계의 현실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여전히 유니폼을 입고 뛸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는 베테랑의 품격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팀이 필요로 하는 ‘슈퍼 서브’
고종욱의 가치는 주전 라인업에서 빛나지 않을지라도 팀에게는 반드시 필요한 존재라는 점에서 나온다. 2011년 히어로즈에서 프로 생활을 시작해 SK 와이번스를 거쳐 2022년 KIA에 둥지를 튼 그는, 어느덧 세 번째 팀에서 베테랑의 역할을 묵묵히 수행하고 있다. 특히 그의 타격 능력은 여전히 리그 상위권으로 평가받는다. SK 감독 시절 트레이드를 통해 그를 영입했던 염경엽 LG 감독은 “종욱이는 원바운드 볼도 안타로 만들어내는 재주가 있다. KIA 타자 중 가장 무섭다”고 평가할 정도로 그의 콘택트 능력은 정평이 나 있다. 수비에서의 약점이 그의 발목을 잡았지만, ‘맞히는 재주’ 하나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1000안타 대기록을 향하여
통산 성적은 그의 꾸준함을 증명한다. 1106경기에 출전해 타율 0.302, 989안타, 50홈런, 413타점, 130도루를 기록 중이다. 이제 단 11개의 안타만 더하면 개인 통산 1000안타라는 의미 있는 금자탑을 쌓게 된다. 비록 전성기처럼 많은 경기에 나서지는 못하지만, 대타, 대주자 등 주어진 역할에 최선을 다하며 팀 승리에 기여하고 있다. 2024년에는 생애 첫 FA 자격을 얻어 2년 5억 원에 계약하며 프로 선수로서의 권리를 행사하기도 했다. 연봉은 삭감되었지만, 그는 다가오는 2월 일본 고치 스프링캠프에 정상적으로 참가하며 새 시즌을 준비한다. 팀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안정적으로 미래를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손아섭: 전설의 쓸쓸한 겨울
고종욱과 달리, 그의 동기 손아섭의 겨울은 유난히 춥고 길다. KBO리그 통산 2618안타로 이 부문 역대 1위에 빛나는 ‘살아있는 전설’이지만, 그는 현재 소속팀을 찾지 못한 FA 미아 신세다. 2007년 롯데 자이언츠에 입단해 NC 다이노스를 거쳐 지난해 한화 이글스까지, 그는 언제나 리그를 대표하는 교타자였다. 두 번의 FA 계약을 통해 162억 원이라는 천문학적인 돈을 벌어들이며 자신의 가치를 입증했다.
세월의 무게 앞에 무너진 철옹성

하지만 영원할 것 같았던 그의 아성도 세월의 무게 앞에 흔들리고 있다. 전성기와 비교해 장타력과 주력이 눈에 띄게 감소했으며, 수비 능력 또한 예전 같지 않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홈런도, 도루도, 안정적인 수비도 없는 손아섭은 그저 ‘안타만 잘 치는’ 평범한 선수로 전락했다는 냉정한 시선도 존재한다. 원소속팀 한화는 물론, 베테랑 선수들을 잘 활용하는 것으로 알려진 키움 히어로즈마저 그에게 손을 내밀지 않았다. 보다 못한 한화가 뒤늦게 1년 계약을 제시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그 조건은 지난해 FA 미아였던 하주석(최대 1억 1천만 원)과 비슷한 수준인 것으로 전해진다. 이는 그의 화려했던 과거와 비교하면 초라하기 짝이 없는 대우다.
3000안타의 꿈, 그리고 현실의 벽
손아섭에게는 리그 최초 3000안타라는 위대한 목표가 남아있다. 하지만 이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꾸준한 출전 기회가 보장되어야 한다. 현재 그의 상황은 주전 자리를 보장받기 어렵다. 만약 계약을 하더라도, 제한된 기회 속에서 대기록에 도전해야 하는 힘겨운 싸움을 벌여야 할지도 모른다. 동기인 고종욱이 팀의 스프링캠프 합류를 준비하는 동안, 손아섭은 홀로 방망이를 휘두르며 기약 없는 기다림을 이어가고 있다. 전설의 마지막 여정이 이토록 험난할 것이라고 누가 예상했을까.
결론: 현재의 가치가 미래를 결정한다
연봉이 삭감되었지만 팀에서 자신의 역할을 인정받는 고종욱, 그리고 화려한 경력을 뒤로한 채 찬바람을 맞고 있는 손아섭. 1988년생 동갑내기 두 선수의 엇갈린 운명은 프로의 세계가 얼마나 냉혹한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과거의 영광이 아닌, 현재 팀에 기여할 수 있는 ‘가치’가 선수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이다. 고종욱은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팀이 원하는 역할에 자신을 맞춤으로써 생존에 성공했다. 반면, 손아섭은 자신의 이름값과 현실 사이의 괴리 속에서 힘겨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부디 손아섭이 자신을 원하는 팀을 찾아 3000안타의 위대한 도전을 이어갈 수 있기를, 그리고 고종욱이 1000안타를 달성하며 베테랑의 품격을 보여주기를 모든 야구팬들이 한마음으로 응원하고 있다.